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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페라리와 람보르기니의 질긴 악연

남자의 로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슈퍼카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슈퍼카를 만드는 회사 두 곳이 있습니다. 바로 람보르기니와 페라리죠. 이 두 회사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자동차 제조사로써, 특히 전 세계를 주름 잡는 스포츠카 제조사이기도 합니다. 이 두 회사는 언제나 서로에 대한 라이벌 의식 속에서 더 나은 자동차, 더 나은 성능, 더 나은 디자인으로 새 모델을 출시해왔는데요. 람보르기니와 페라리. 이 두 회사의 질긴 악연은 196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60년대 초, 이미 페라리의 창업자인 엔초 페라리는 세계 유수의 자동차 그랑프리에서 자신이 직접 개발한 자동차로 레이싱에 참가해 수많은 우승컵을 들어올렸죠. 특히 1952년 스포츠카의 거장 피닌 파리나를 영입하여 페라리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만들어나가면서 말 그대로 달리는 예술품으로 페라리를 진화시키고 있었죠. 말 그대로 1960년대 초까지 페라리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스포츠카 제조사로써 그 명성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 페라리 사의 창업주 엔조 페라리 >

그러던 와중에 이탈리아에서 군용트럭을 개조하여 트랙터로 개조하는 사업을 하고 있던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엔초 페라리를 찾아오게 됩니다. 당시 페루치오가 소유하고 있던 페라리 250GT가 클러치 쪽에 결함이 발생했던 것이죠, 기계 공학을 전공하고, 이미 자신의 피아트를 개조해 레이싱 대회에 출전할 만큼 자동차 지식이 뛰어났던 그는, 엔초 페라리를 찾아가 이 문제에 대한 개선점을 논의코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 엔초 페라리의 반응이 가히 압권이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트랙터나 만들던 사람이 어떻게 슈퍼카를 알겠는가? 트랙터나 운전하면서 살라.” 이렇게 람보르기니는 페라리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게 됩니다.

< 람보르기니 사의 창업주 페루지오 람보르기니 >

이 일이 있고 난 후, 페루지오 람보르기니는 페라리를 능가하는 슈퍼카를 직접 만들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실제로 그는 애초에 자동차 회사를 만들 생각이 없었지만, 이 사건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슈퍼카 제조사 람보르기니를 탄생시키게 된 것이죠. 특히 페루지오는 무조건 페라리보다 빨라야한다.’는 첫 번째 원칙을 세우고 공격적인 투자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등장한 첫 차가 바로 350GT였죠. 물론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듯이, 첫 차량에서는 페라리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가능성을 볼 수 있었죠.

  < 람보르기니의 첫 양산차 350GT >

시간이 흘러 1966. 람보르기니는 미우라를 선보이게 됩니다. V12 4리터 엔진을 탑재한 이 차는 최대출력 350마력, 최고시속 295km의 성능을 보였는데, 페라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최대출력 302마력, 최고시속 273km250GTO를 우습게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세계 최초의 슈퍼카칭호는 람보르기니가 차지하게 되었죠, 뿐만 아니라, 이 차량에 적용된 미드십 방식 (엔진을 운전석 뒤쪽에 배치해 차량의 전후 밸런스를 맞춘 방식)은 페라리의 창업자 엔초 페라리가 패배를 인정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 이후에 페라리에서는 이 방식을 사용해 신차를 개발했기 때문이죠.

< 1966년 출시된 람보르기니 미우라 >

람보르기니와 페라리. 이 두 회사는 그 이후로 엎치락 뒤치락 서로에 대한 경쟁심으로 더 나은 슈퍼카를 제작해왔습니다. 물론 두 회사 모두 재정적인 문제로 인해 람보르기니는 아우디-폭스바겐으로, 페라리는 피아트 사의 지원을 받을 수 밖에 없게 되었지만, 이 두 회사는 지금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차를 만들어내기 위한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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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여담으로, 페루지오 람보르기니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엔초 페라리가 90세까지 살았으니, 나는 91세까지 살아 페라리를 이기겠다.’ 물론 실제로 람보르기니는 77새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페라리를 이기지는 못했죠. 하지만 그가 얼마나 페라리에 대한 경쟁의식을 갖고 있었는가 엿볼 수 있습니다.